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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승호 교수의 현대미술론 5. 마티스와 이중섭의 춤의 리듬으로 인간의 몸이 세계와 만나다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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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움직일 때, 세계는 다시 사유되기 시작한다

르네 데카르트 이후 모더니즘 미술은 재현을 해체하는 과정 속에서 주체성을 전면에 등장시켰다. 세계는 더 이상 ‘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지각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묻는 질문으로 이동했다. 앞선 칼럼에서 살펴본 폴 세잔과 오지호에게 자연이 더 이상 재현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들의 회화는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 인식이 어떠한 질서로 조직되는지를 드러내는 장이었다.

이번 칼럼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인간의 몸이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라는 문제로 향해보고자 한다. 앙리 마티스와 이중섭(1916–1956)의 ‘춤’은 20세기 미술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한다. 시대와 공간, 문화적 배경은 분명히 달랐지만, 두 작가는 춤을 통해 몸과 지각의 세계를 동시에 열어젖혔다. 하나는 우주적 질서로서의 리듬을, 다른 하나는 생존의 조건으로서의 리듬을 제시한다. 방향은 달랐지만, 질문은 동일했다.


La_danse__by_Matisse Tanz I, 1906. (김승호 교수 제공)

앙리 마티스의 <춤>: 움직임이 아니라, 세계가 자신을 정렬하는 방식

“창의성은 용기를 요구한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이 말은 새로운 것을 더하는 용기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끝까지 덜어낼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미술에서 본질이 아닌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태도다.

마티스의 <춤>에는 두 개의 버전이 존재한다. 1909년작은 뉴욕 MoMA에, 1910년작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후자의 작품은 색채가 더 어둡고, 형상은 더욱 단순하다. 같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결단의 깊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1909년의 <춤> 속 다섯 인물은 얼굴의 표정도, 개별적 서사도 없는 붉은 몸들이다. 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하나의 원을 이루며 춤춘다. 푸른 하늘과 초록의 대지 그리고 붉은 인체가 이루는 삼색 구조는 원형적 질서를 강조한다. 해부학적 정확성마저 포기한 단순화된 인체는 부분적으로 강조된 윤곽선에 의해 연결되고, 그 연결이 곧 리듬이 되어 화면을 지배한다. 형상들은 불균형한 듯 보이지만, 화면 중심에 남겨진 빈 공간이 원형의 리듬을 붙잡는다.

이 작품에서 인체는 개별화되지 않으며, 감정의 제스처나 관능적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몸과 몸이 연결되어 하나의 리듬을 형성하는 존재로 제시된다. 마티스의 누드는 세계와 접속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상태를 드러낸다. 말과 개념 이전에 인간은 몸으로 세계를 이해해 왔고, 리듬은 존재가 서로 공명하는 방식이다.

마티스에게 붉은 인체, 푸른 하늘, 초록의 대지는 세계를 조직하고 질서를 생성하는 매체다. 인체 해부학, 원근법, 명암과 그림자에서 과감히 멀어진 그의 선택은 모더니즘을 향한 탐구의 결과였다. 로댕의 육체성, 고갱의 색채, 반 고흐의 선, 쇠라의 점묘, 세잔의 조직화된 화면을 거쳐, 그는 모든 것을 더 간결한 리듬으로 정렬했다. 분석과 구조 대신 절제를, 과잉 대신 비움을 택했다.

마티스에게 <춤>은 예술이 어디까지 비워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며, 그 비움의 끝에서 발견된 원형의 리듬은 곧 세계가 자신을 정렬하는 방식이다. 이 작품은 데카르트적 생각하는 주체를 넘어, 인간의 몸이 세계와 하나의 리듬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절제된 색과 형태로 증명한 회화적 선언이다.


이중섭, 춤추는 가족, 1953-195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승호 교수 제공)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 생존은 리듬으로 몸에 새겨진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1953–56)은 마티스의 세계와 나란히 놓일 수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의 차이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삶의 조건에서 비롯된다. 마티스에게 춤이 우주적 질서의 회전이라면, 이중섭에게 춤은 전후의 현실 속에서 살아내기 위해 선택된 몸의 행위다.

이중섭의 춤은 가난과 이산, 불안이라는 압력 속에서 가족이 서로에게 기대어 버티기 위해 만들어낸 정동의 리듬이다. 다시 말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존재적 장치다.

그의 화면에서 선은 떨리고, 밀리고, 갑작스레 꺾이며 끊어질 듯 이어진다. 이 선은 윤곽이 아니라 정서의 진동이다. 인체는 해부학적 안정성을 포기한 채 늘어나고 비틀리며 서로 얽혀 있다. 토색과 갈색, 황색 계열의 색채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땅에 붙은 생존의 색이다.

인물들은 서로 손과 몸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마티스처럼 완결된 원을 이루지 않는다. 중심은 비어 있지 않고 밀집되어 있으며, 리듬 역시 순환이 아니라 넘어질 듯 이어지는 연쇄, 불안한 응집으로 나타난다. 네 명의 가족 모두 누드이지만 관능적이지도, 이상화되지도 않았다. 아이와 어른의 몸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처럼 엉켜 있다. 굶주림과 상실, 그리고 보호 본능을 동시에 품은 몸이다.

작품의 제목은 ‘가족’이지만, 여기서 가족은 제도가 아니라 서로의 생존을 떠받치는 최소 단위의 공동체다. 춤은 기쁨이 아니라 저항이며, 절망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리듬이다. 전쟁과 이산, 가난이라는 현실 속에서 존재를 붙잡기 위한 행위다.

두 아이의 뒤로 접힌 고개와 과장된 팔짓, 아내의 쪼그려 앉은 몸과 내민 손, 남편이자 아버지의 잔뜩 들어 올린 어깨는 하나의 메시지를 공유한다. “우리는 함께 버티고 있다.”이 몸짓들은 서로를 놓지 않는다. 이중섭에게 춤은 그렇기에 아름답게 완결되지 않는다. 그의 화면에는 긴장이 배어 있다. 춤은 삶의 조건 그 자체이며, 존재가 스스로를 회복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리듬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춤추는 가족>은 비극적 현실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성이 끝내 무너지지 않음을 증언한다. 개인의 서사를 넘어, 존재를 붙잡는 행위 자체로서의 춤이다. 이것이 이 작품이 한국 미술사에 자리하는 이유일 것이다.

같은 몸과 같은 춤, 두 개의 세계관

마티스의 <춤>에서 인간의 몸은 세계와 조우한다. 색은 무게를 잃고, 붉은 몸들은 푸른 하늘과 초록의 대지 위에서 하나의 원을 이룬다. 존재가 세계와 리듬으로 공명할 수 있다는 믿음, 세계 속에서 평온을 회복하는 원초적 장면이다. 몸은 개인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에 참여하는 하나의 리듬이 된다.

반면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은 세계에 머문다. 그의 인물들은 서로를 붙잡고 끌어당기며, 넘어질 듯 이어진다. 선은 떨리고, 몸은 비틀린다. 그것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선택된 리듬이다. 가족은 생존의 공동체 형식이며, 춤은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결연한 몸의 언어다.

마티스와 이중섭의 춤은 세계-안에-존재하는 몸의 두 가지 근본적 양태, 즉 조화의 리듬과 생존의 리듬을 시각적으로 증언한다. 같은 몸, 같은 춤이라도 지각의 구조가 달라질 때 세계의 모습 역시 달라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서구와 한국의 모더니즘을 함께 사유하고 비교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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