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는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달라지는가
앞선 칼럼에서 우리는 회화의 이미지가 기억을 어떻게 붙잡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조각으로 오면 질문은 달라진다. 무엇을 닮았는가가 아니라, 형태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가 문제로 떠오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근대적 주체를 확립했듯이, 모더니즘 미술 역시 외부 세계의 모방에서 벗어나 형식 그 자체의 문제로 깊이 들어간다. 그 결과 미술의 형태는 더 이상 고정된 구조로 머물지 않고, 스스로를 해체하고, 압축하며, 때로는 멈추는 상태로 변형된다.
이전의 조각이 무엇을 보여주는가를 물었다면, 모더니즘의 조각은 형태가 어떻게 성립하고 어떻게 머무는가를 드러낸다. 조각은 완성된 결과라기보다 하나의 상태로 존재한다. 어떤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어떤 것은 끝까지 응축되어 있으며, 또 어떤 것은 그 사이에서 조용히 멈추어 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양식의 변화가 아니다. 형태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이다. 미술사학자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지적했듯이, 현대조각은 완결된 형식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태가 무너지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이 있다. 로댕 이후 조각은 더 이상 안정된 형상으로 머물지 않는다. 형태는 무너지고, 응축되며, 멈춘다.
이 글은 그 세 가지 장면을 따라간다. 로댕의 <지옥의 문>, 콘스탄틴 브랑쿠지(Constantin Brâncuși)의 <비상> 그리고 김종영의 <추상조각>, 이 세 작품은 다시 묻게 된다. 조각은 무엇을 만드는가가 아니라, 형태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로댕의 <지옥의 문>(1880–1917) : 형태의 붕괴 - 비완결성, 파편성, 생성 중인 형상
로댕의 <지옥의 문>은 프랑스 정부의 의뢰로 장식미술관 입구를 위해 제작되었으나, 미술관 건립 계획이 취소되면서 독립 작품으로 남았다. 현재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의 석고 원형을 기준으로 여러 청동 주조본이 제작되어 파리의 로댕 미술관을 비롯한 세계 여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거대한 작품 앞에 서면 형태는 더 이상 안정된 구조를 갖지 않는다. 수많은 인체가 한꺼번에 뒤엉켜 있고, 어디가 중심인지 한눈에 잡히지 않는다. 한 인물의 팔이 다른 인물의 몸과 겹치고, 상체와 하체는 서로 비틀리며, 어떤 형상은 표면에서 튀어나오다가 다시 안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조각에서 기대되는 중심과 안정된 윤곽은 이 작품에서 무너진다. 형태는 정리되지도, 닫히지도 않는다. 각 인체는 서로를 밀고 당기며 하나의 불안정한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작품이 ‘완성된 문’이라기보다 형태가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 장면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때 중요한 개념이 바로 비완결성(non-finito)이다. 이것은 단순히 덜 만들어진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완성을 향해 가다가 멈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완결을 거부한 채 형태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과정 속에 머문다는 뜻이다.
<지옥의 문>의 표면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표면은 거칠다. 그 거친 표면은 조각가의 손길이 지나간 흔적이면서 동시에 형상이 아직 고정되지 않았다는 신호이다. 이제부터 조각은 완성품이 아니라 진행 중인 사건임을 선언하는 셈이다.
작품 속 형상들이 각각 독립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놓칠 수 없다. 이 작품에서 나온 형상들이 다른 작품으로 분리되면서, 앗상블라주의 가능성도 열린다. 파편들의 집합이라는 뜻이다. 각각의 부분은 반복될 수 있고, 개별화되며, 다른 공간에서 독립된 작품으로 놓일 수 있다. 로댕에게 조각은 단일성이나 유일성이 아니라, 분리와 재배치가 가능한 구조인 셈이다.
<지옥의 문>은 형태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를 보여준다. 로댕은 붕괴라는 개념을 조각에 첨가한 모더니스트였다. 여기서 붕괴란 무너져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형태가 고정되지 않고 열려 있다는 뜻이다. 로댕에게 조각은 완성된 형상이 아니라, 무너지고 생겨나는 형상의 과정이었다.
브랑쿠지의 <비상>(1923–1940) : 형태의 응축 ― 환원, 본질, 자율적 형식
브랑쿠지, <비상>, 1923–1940, 폴리시드 브론즈·석재·목재, 약 185cm(본체), 최대 287cm(좌대 포함), 워싱턴 국립미술관
브랑쿠지의 <비상> 역시 로댕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 반복 제작된 연작이다. 초기 <마이아스트라(Maiastra)>에서 발전한 이 작품은 퐁피두센터, 테이트 모던, 모마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주조본이 소장되어 있다. 1926년 미국 세관이 이 작품을 예술품이 아니라 산업제품으로 오인했던 사건은 이 작업이 얼마나 급진적인 추상조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비상> 앞에 서면 분위기는 로댕과 완전히 달라진다. 복잡하고 뒤엉킨 로댕과 달리, 브랑쿠지의 조각은 놀랄 만큼 단순하다. 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날개도 없으며, 머리도, 몸통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바라보다 보면, 무언가가 위로 가볍게 솟아오르는 느낌, 곧 ‘날아오름’의 감각이 선명하게 생겨난다.
<비상>은 새를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상하는 상태 그 자체를 환원(reduction)한 작품이다. 환원이란 복잡한 외형을 모두 제거하고 가장 중요한 핵심만 남기는 방식이다. 브랑쿠지는 새를 새답게 만드는 요소들, 곧 날개, 깃털, 머리, 몸의 구분까지 모두 걷어낸다. 그리고 오직 상승이라는 운동감만 남긴다. 이 순간 “무엇을 닮았는가”라는 질문은 물러나고, “어떤 본질을 응축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전면에 나타난다. 본질의 문제가 바로 <비상>을 통해 모더니즘 조각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브랑쿠지 작품의 표면 또한 결정적이다. 표면은 거울처럼 매끈하고 반짝인다. 로댕의 표면이 거칠고 흔들린다면, 브랑쿠지는 모든 흔적을 지운다. 조각가의 손길마저 지워진 것처럼 보인다. 관람자는 자연스럽게 조각 내부의 제작 과정 대신 형식 그 자체와 마주하게 된다.
브랑쿠지는 자율적 형식에 천착한 모더니즘 조각가다. 자율적이라는 것은 외부 서사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서 있다는 뜻이다. 연작 <비상>은 이 새가 어디서 날아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의 상승하는 형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브랑쿠지의 조각 앞에 서면 이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이 형식은 더 이상 줄일 수 없겠다.” 더 빼면 사라지고, 더 더하면 흐려질 것 같은 응축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로댕과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로댕이 형태를 열어놓았다면, 브랑쿠지는 형태를 끝까지 밀어붙여 닫는다. 로댕이 ‘흩어짐’이라면, 브랑쿠지는 ‘응축’이다. 그에게 조각은 무너지는 형상이 아니라, 끝까지 압축된 본질의 형식이다.
김종영의 <추상조각> : 형태의 머묾 ― 유보, 자연적 추상, 상태
한국 추상조각을 정착시킨 김종영의 <추상조각>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김종영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재현에서 이탈해 형태 자체에 천착한 결과로 나온 작업들이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브랑쿠지처럼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차이를 느끼게 된다. 완전히 닫혀 있지 않고, 무엇보다 표면이 다르다. 브랑쿠지가 표면을 완벽하게 연마해 빛을 반사하게 만들었다면, 김종영은 돌의 표면 질감을 살린다. 차가운 청동의 광택이 아니라 돌의 숨결, 곧 조각가가 질료를 끝까지 통제하려 하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다. 따라서 그 표면은 차갑고 완결된 인공 구조라기보다, 오랜 시간 자연 속에서 다듬어진 추상적 형상처럼 느껴진다.
형태 역시 그렇다. 단순하지만 기하학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한 방향으로 뻗어나가거나 매듭지어지지도 않는다. 내부의 흐름을 따라 멈춘다. 완성되었다는 느낌보다,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이때 필요한 개념이 유보(suspension)다. 유보는 덜 만든 상태가 아니다. 더 다듬고 더 깎을 수 있었지만, 그 지점에서 의도적으로 멈춘 상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유보는 결핍이 아니라 절제이며, 중단이 아니라 머묾이다.
김종영의 조각을 보고 있으면 바람이나 물이 오랜 시간 돌을 깎아 만든 형상처럼 느껴진다. 형태가 인공적으로 조립된 것처럼 보이지 않고, 자연 속에서 스스로 생겨난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을 자연적 추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자연적 추상이란 자연의 외형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형성되는 방식에서 출발하는 조각적 태도이다. 자라고, 깎이고, 균형을 이루는 리듬이 그의 추상조각의 근원이 되는 셈이다.
김종영은 자연적 추상을 통해 브랑쿠지와의 거리를 분명히 한다. 전자가 ‘객체’처럼 느껴진다면, 후자는 하나의 ‘상태’로 남는다. 돌은 그 자리에 서 있지만, 고정된 느낌이 아니라 시간 속에 놓여 있는 느낌을 준다. 여전히 조금씩 변할 수 있을 것 같고,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 것 같다.
자연, 곧 ‘스스로 그러함’이 김종영으로 하여금 모더니즘 조각의 무게에서 한 걸음 벗어나게 했다면, <추상조각>은 브랑쿠지의 응축과 로댕의 붕괴를 지나 조각적 형태가 머무는 길을 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종영에게서 조각은 압축된 본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분리와 재배치의 구조도 아니다. 그에게 조각은 자연 속에 머무는 형식의 상태이다.
모더니즘의 조각 ― 붕괴, 응축, 유보
이 세 조각은 하나의 흐름으로 읽을 수 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 로댕 앞에서는 형태가 스스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흔들리며 무너지는 과정을 보게 되고, 브랑쿠지 앞에서는 그 흔들림이 끝까지 밀려가 하나의 형식으로 응축되는 순간을 보게 된다. 김종영 앞에서는 그 응축된 형식이 다시 멈추어 머무는 상태로 전환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 세 장면은 서로 다른 시대의 결과가 아니라, 모더니즘 조각이 존재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다. 세 가지 방식을 묶으면, 형태의 붕괴, 형태의 응축 그리고 형태의 유보가 된다. 하나의 흐름으로 말하면, 조각은 ‘붕괴―응축―유보’의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
로댕은 조각을 완결된 형식에서 끌어내려 흔들리는 상태로 만들었고, 브랑쿠지는 그 흔들림을 제거하여 형태를 끝까지 압축했다. 김종영은 그 압축된 형식을 다시 완결시키지 않고, 멈추어 머무는 상태로 남겨두었다.
그러므로 조각은 더 이상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태로 놓이게 되는가의 문제로 전환된다. 어떤 조각은 아직 붕괴 속에 있고, 어떤 조각은 완결된 응축에 도달하며, 어떤 조각은 그 사이에서 멈추어 머문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배타적인 존재방식이 아니라, 조각이 취할 수 있는 서로 다른 가능성이다. 조각의 자율성은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시작되는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속에서 다시 생각되어야 한다.
조각은 더 이상 단단한 물체가 아니다. 또한 완성된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무너지고, 응축되며, 머무는 하나의 상태이다. 따라서 조각을 다르게 보아야 한다. 이 작품이 무엇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이 형태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로댕의 비완결성은 형태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브랑쿠지의 환원은 복잡한 외형을 제거하고 본질만 남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김종영의 유보는 완성과 붕괴 사이에 머무는 부드러운 조각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형태는 무너질 수 있고, 응축될 수 있으며, 또한 머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세 가지 가능성 속에서 큐레이터와 평론과 그리고 미학자의 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
https://thepress1.com/news/101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