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소식         회원동정 News on Member

[칼럼] 김승호 교수의 현대미술론 7. 추상이 그림이 되는 조건, 칸딘스키, 몬드리안, 김환기의 작품에서 경험한다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6
앞선 칼럼에서 우리는 세잔에서 피카소 그리고 구본웅의 초상화를 통해 모더니티의 새로움과 주체의 위기를 살펴보았다. 세잔의 초상화에서 데카르트의 주체성이 더 이상 확고한 중심이 되지 못했고, 피카소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인물의 주체성을 면과 선으로 분해해 다시점 속으로 밀어 넣었다. 구본웅은 구한말 ‘근대적 주체’가 더 이상 안정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것을 초상화로 응수했다. 그들 모두의 초상화에는 얼굴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얼굴들은 더 이상 인물의 정체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20세기 전반기 주체의 균열을 드러내는 장르로 바뀌었다.

그 이후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상에 대한 질문이 달라진다. 미술은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 그 응답은 크게 세 가지 길로 갈라진다. 세잔 이후 큐비즘을 거쳐 대상을 완전히 제거하며 형식의 자율화를 선택한 길이 그 중 하나다. 자기비판이라는 시민사회 속에서 작품의 개념과 제도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두 번째 길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불안정한 주체의 자리에 윤리적 잔여로서의 형상을 남기는 것이다. 이 세 갈래는 모두 ‘재현 이후의 미술’이라는 공통의 조건 위에서 출발한다.

이번 칼럼에서는 추상미술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초기 추상은 큐비즘 이후에 ‘등장한 하나의 양식’이 아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남겨놓은 근대적 주체성에 대한 응답이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도 다르다. “무엇”이 아니라 “그림이 그림이기 위해 남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림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응답을 칸딘스키, 몬드리안, 그리고 김환기의 작품에서 차례로 살펴보면서 찾아 보자.


칸딘스키, <구성>, 종이에 아크릴, 인도잉크, 팬, 1910, 49.6 x 64.8cm, 파리 퐁피두 센터

바실리 칸딘스키의 <무제>(1910) : 내적 필연성

파리 퐁피두 센터에 소장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무제>는 최초의 추상화로 알려진 작품이다. 종이에 아크릴과 인도산 잉크, 펜으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익숙하게 인식할 수 있는 형태도, 화면 요소들 사이의 명확한 서사적 연관성도 거부한다. 빨강·파랑·노랑이 서로 충돌하면서 화면 전체에 리듬을 형성한다. 이 삼원색들은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자율적인 힘으로 작동한다. 윤곽의 구속에서 벗어난 선들 역시 화면 곳곳에 흩어지며, 사물의 경계를 긋지 않고 방향성과 운동감을 남긴다.

칸딘스키의 <무제>는 단순한 추상화라기보다 추상이라는 상태 그 자체에 가깝다. 이는 감정의 분출이나 무의식적 자동기술이 아니라, 형식이 스스로 요구하는 방향에 작가가 응답하는 상태, 즉 색은 색이 요구하는 자리에, 선은 선이 가야 할 방향으로 배치되는 내적 필연성의 결단이다. 러시아 출신의 작가는 더 이상 세계를 재현하는 주체를 거부하고 추상미술에서 형식의 요구를 출현시킨 존재자다. 20세기 회화는 더 이상 외부 세계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조건만으로도 미적 대상이 된다.

칸딘스키는 1912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를 출간하며 이러한 추상 개념을 이론적으로도 정립했고, 전환점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마저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그의 주장, 큐비즘 이후 여러 갈래 가운데 ‘추상’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가장 이른 시점에서 보여준다. 대상의 해체에 머문 큐비즘과 달리, 그는 대상을 처음부터 제거함으로써 형식의 자율성을 확보했다. 피카소가 “사물은 어떻게 보이는가”를 분석했다면, 칸딘스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 형식이 되는가”로 응답한 모더니스트다.


몬드리안, <빨강, 파랑, 노랑 구성 II>, 1930, 캔버스에 유채, 45 × 45cm, 스위스 쥬리히 미술관 소장

피트 몬드리안의 <빨강·파랑·노랑의 구성 II>(1930): 큐비즘 이후, 질서의 윤리 

스위스 취리히 미술관에 소장된 피트 몬드리안(Pieter Cornelis Mondriaan, 1872–1944)의 <빨강·파랑·노랑의 구성 II>(1930)는 삼원색의 관계적 대비와 비대칭적 균형을 통해 순수한 색면 회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작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에 체류하며 큐비즘을 깊이 연구한 몬드리안. 그는 대상의 해체만으로는 재현 이후의 세계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피카소의 분석적 태도를 보편적 규범으로 전환하고, 다시 질서로 봉합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수평과 수직이라는 최소한의 구조였다. 초기작에서 보여주듯이 이는 자연의 외관을 단순화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의 모든 관계를 포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찾는 결단이었다. 삼원색 역시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화면을 분절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구조적 요소로 기능한다. 붓질의 흔적이나 주관적 표현은 철저히 배제되며, 화면에는 오직 선택된 필연성만이 남는다.

몬드리안의 “구성” 회화는 자연주의적 외관에서 완전히 해방된 순수 추상이다. 그는 “공평한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듯, 개별성을 제거한 자리에서 보편적 질서를 모색했다. 파리에서의 몬드리안이나 뮌헨의 칸딘스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대지 사이에 존재하듯이. 수평과 수직 사이에서 인간 존재를 인지(감성과 오성이 결합된 존재)하기 마련이다. 몬드리안은 세계 내 보이지 않는 구조를 보편적 어법으로 구성한다. 추상이 감정과 영성의 해방이었던 칸딘스키와 달리, 몬드리안에게 있어 추상은 세계가 도달해야 할 질서의 윤리였다. 둘 다 큐비즘이 남긴 여백에 응수했지만. 몬드리안은 보편성과 규범이라는 전혀 다른 응답을 내놓는다.


김환기, <19-Ⅵ-71#206>, 1971, 캔버스에 유채, 254 × 203cm, 개인 소장.

김환기(1913–1974)의 〈19-Ⅵ-71 #206〉(1971): 큐비즘 이후의 추상, 그리고 한국적 응답

칸딘스키가 추상에서 회화의 자율적 탄생 조건을 발견했고, 몬드리안이 그것을 질서의 윤리로 정식화했다면, 김환기는 추상개념의 층위를 달리한다. 그의 그림은 자율적 형식이나 규범으로 완결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이후에도 어떤 조건이 남아 있는가. 1971년의 대형 점畵 <19-Ⅵ-71 #206>은 이에 대한 김환기의 응답이다.

이 화면에는 더 이상 대상도, 재현도, 표현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반복되는 점과 그 사이의 간격이 리듬을 만든다. 그 리듬은 원형의 흐름을 이루며 화면 전체로 퍼져 나간다. 전면 회화의 형식이다. 우리의 시선도 자연스레 점을 따라 이동하고, 그 이동의 과정 속에서 화면이 우리의 인식 속에서 완성된다. 그에게 추상개념은 이렇듯 하나의 완결된 대상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경험되는 공간(우주적)이 된다. 난해한 주장만은 아니다.

김환기의 화면에 감지되는 질서는 전전의 추상미술에서 추구한 규범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몬드리안의 그리드처럼 보편적 구조를 제시하지도, 칸딘스키처럼 내적 긴장을 전면에 드러내지도 않는다. 사각-화면의 중심도 방향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화면이 보이는 것을 해체나 근대적 주체성의 붕괴도 진솔하지 않는다. 서구와 달리 반복되는 몰입과 행위 그 자체다. 자그마한 차이를 보는 즐거움도 내제되어 있다. 점들이 모여서 생성된 원형, 층층이 겹쳐져 깊어지는 관조, 추상성은 더 이상 결단이나 선언의 문제가 아니라, 몬드리안 이후 지속 가능성의 추상적 형식으로 이동했음을 깨닫게 한다.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청록의 색 면 역시 의미를 요구하지 않는다. 자연의 추상화도, 영혼의 자기화도, 세계 내 감성화도 상징하지 않는다. 점으로 축적된 색이 하나의 세계이자 세계가 하나로 작동한다. 서구와 달리 관람자인 우리는 김환기의 작품을 ‘보는 주체’라기보다 그 안에 머무는 존재자다. 김환기는 말하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상태, 주장하지 않지만 유지되는 세계를 제시한다. 그의 추상은 그렇게 그림이 끝나지 않는 방식을 보여준다. 피카소를 존경했던 그에게, 점畵는 서구의 전전 추상에 대한 한국적 응답이다.    

추상미술 : 그림이 되기 위한 조건

추상개념과 추상미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철학에서 추상이 존재의 층위를 구분하는 방식이고 감각 이후 형식과 이념과 구분을 사유하는 반면에, 20세기 미술에서 추상은 전쟁과 불안 속에서도 큐비즘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자각에서 출발했다. 그렇기 때문에 칸딘스키는 내적 필연성에서 자율성을 추구했고, 몬드리안은 사회적 혼돈에도 불구하고 유지될 수 있는 질서의 윤리를 철저히 실현했다. 김환기에게 추상미술은 이와 달리 주체와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그림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망명이든 이주든 그들 모두는 이방인으로서 그림이 그림으로써 존재하는 이유는 추상에서 찾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이 되기 위한 조건은 표현도 규범도 아니다. 침묵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형식과 자율성 그리고 그 형식이 지속될 수 있다는 큐비즘 이후의 믿음이다. 추상에서 형식과 자율성은 하나의 양식이 아니다. 주체성이 외부 세계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성립할 수 있는 형식이다. 칸딘스키는 형식의 자율성을, 몬드리안은 질서의 윤리, 김환기가 지속 가능한 형식을 보였듯이, 추상은 양식이 아니라 존재 조건이다. 주체가 흔들리고 재현이 붕괴한 이후에도 그림이 여전히 그림일수 있는 이유, 그 물음이 남아 있는 한 추상은 끝나지 않는다. 21세기 오늘에도 여전히 현대미학의 핵심 개념으로 남아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