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플릭스] 철학박사 김승호/동아대학교 교수 = 앞선 칼럼에서 우리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네오 구성주의(Neo-Constructivism)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아방가르드 미학의 혁신성을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그 연장선에서, 데 스틸(De Stijl)과 네오 데 스틸(Neo De Stijl)이 서로 밀어내고 끌어당기며 만들어낸 가구 미학의 변화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고자 한다.
아방가르드의 혁신은 단지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재현이 멈춘 이후에도 예술은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윤리적 결단이 20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등장한 데 스틸이었다. 그리고 네오 데 스틸은, 그 결단이 더 이상 그대로 유효하지 않게 된 이후에도 형식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다시 묻는다.
이 흐름의 출발점에는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과 게리트 리트펠트(Gerrit Rietveld, 1888–1964)가 두 축을 이룬다. 두 전위 예술가는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그 역할은 분명히 달랐다.
몬드리안은 회화와 이론을 통해 보편적 질서의 문법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수직과 수평, 직각, 삼원색이라는 최소한의 조형 요소만으로도 재현 이후의 세계가 여전히 질서로 사유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몬드리안의 질서는 ‘보는 질서’다. 그는 데 스틸에서 질서를 사유한 철학자에 가깝다.
반면 리트펠트는 데 스틸의 문법을 가구와 건축이라는 삼차원 공간으로 옮긴 실천가다. 그의 주된 관심은 질서를 눈으로 이해하는 데 있지 않았다. 질서를 몸이 경험하는 조건으로 만드는 데 있었다. 예술을 캔버스에 머물게 하지 않고 생활 세계로 이동시켰다는 점에서, 그는 데 스틸 내부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인물이다. 아방가르드 미학사에서 몬드리안이 재현 이후 질서의 철학자라면, 리트펠트는 그 질서를 일상 속으로 옮겨놓은 실천가라 할 수 있다.
데 스틸의 핵심 │ 보편적 질서
데 스틸의 급진성은 추상적인 형식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 핵심은 세계가 수직과 수평그리고 비대칭의 균형이라는 최소한의 조형 원리로 환원될 수 있다는 믿음에 있다. 자연의 모습, 개인의 감정, 개성은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대신 남는 것은 보편적 질서의 문법이다.
삼원색과 흑·백은 장식이 아니라 구조를 드러내는 기호였다. 예술은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아니라, 질서를 제시하는 행위로 전환된다. 데 스틸에서 구조는 형식 이전의 윤리였고, 예술은 회화와 건축 나아가 가구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미학화로 확장된다.
게리트 리트펠트, 〈적·청 의자(Red Blue Chair)〉, 1918–1923, 채색 목재, 86.7 × 66 × 83.8cm, 뉴욕 현대미술관(MoMA) 소장.
게리트 리트펠트 │ 질서의 일상화
게리트 리트펠트의 <적·청 의자>(1917–1918)는 예술을 일상으로 환원하려는 데 스틸 그룹의 신념을 가장 선명하게 구현한 사례다. 오늘날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된 이 의자는 흔히 생각하는 ‘앉는 물건’이 아니다. 좌판과 등판, 다리와 가로대는 서로를 자연스럽게 떠받치지 않은 채로 독립된 면과 선으로 공존한다.
빨강과 파랑, 노랑은 장식이 아니다. 각각의 요소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읽게 만드는 구조의 표식이다. 이 의자에서 가구는 기능을 수행하기보다 공간을 조직한다. 이 의자가 우리로 하여금 질서를 신뢰하게 만든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리트펠트에게 구조적 질서는 선택 가능한 형식이 아니라, 일상 속으로 다가오는 보편적 상태다.
<적·청 의자>는 데 스틸이 꿈꾸었던 질서 있는 세계의 축소된 모델이다. 따라서 이 의자는 단순한 디자인 혁신이 아니라, 구조를 윤리로 믿었던 마지막 전위적 가구라 할 수 있다.
이 의자는 ‘앉는 가구’라기보다 앉기 이전에 읽히는 구조다. 각 부재는 하나의 덩어리로 완결되지 않고 분리되어 있어, 전체를 보려 할수록 먼저 관계를 인식하게 만든다. 기능이 구조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기능을 앞선다. 데 스틸의 급진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분명해진다.
윔 리트펠트, 〈피라미드 의자(Pyramid Chair)〉, 1959, 강판 프레임, 합판 좌석·등받이, 54 × 55 × 81cm, 아렌드(Ahrend).
네오 데 스틸 │ 구조 이후의 구조
네오 데 스틸은 리트펠트가 남긴 질문, 곧 “질서는 어떻게 살아남는가”에서 출발한다. 이 전환은 그의 아들 윔 리트펠트(Wim Rietveld, 1924–1985)의 <피라미드 의자(Pyramid Chair)>(1959)에서 분명해진다.
윔 리트펠트는 형태와 기능 사이의 균형을 중시한 디자이너였다. 그는 전후 산업 사회에서 좋은 형태, 견고함, 실용성 그리고 합리적인 생산 비용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실제로 그는 동료들과 함께 암스테르담 지하철 초기 계획에 참여했을 정도로, 공공 디자인 전반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피라미드 의자>에서 데 스틸은 더 이상 삼원색의 순수성의 도덕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직교 질서의 최소한의 뼈대와 그것을 산업적으로 반복 생산하는 합리성이다. 아버지의 의자가 ‘삶으로 스며든 윤리’였다면, 아들의 의자는 ‘제도 속으로 고정된 구조’다. 전후 네오 데 스틸은 질서를 믿지 않되, 질서를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질서는 더 이상 답이 아니라 운영의 원리로 남는다. 구조는 이상이 아니라 일상 세계 그 자체가 된다. 세계를 바꾸기보다는, 세계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조건이 된다.
고범석, 〈플로팅 톱 테이블·벤치·의자〉, 호두나무/오크, 고범석 가구(KOBEOMSUK FURNITURE)
한국적 포스트 데 스틸 │ 질서 이후의 윤리
이 전환은 한국의 동시대 가구에서도 나타난다. 고범석의 <플로팅 톱(Floating Top)> 다이닝 세트ㄹ가 그 예다. 그의 가구세트는 삼원색을 완전히 제거한 채, 그리드와 분절만을 지닌다. 구조는 드러나지만 과시되지 않는다. 구조는 침묵 속에서 기능하며, 몸의 동선과 시선의 흐름을 조용히 이끈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전시된 작품들이 바로 그러하다.
이 가구는 데 스틸의 형식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다. 대신 데 스틸의 약속이 철회된 이후에도 구조를 윤리적으로 다루는 태도를 분명히 보여준다. 색으로 구조를 외치지 않고, 구조는 무채의 목재와 정밀한 결구 속으로 잠행한다. 남는 것은 분절, 직각, 반복이라는 형식의 잔여다.
‘플로팅 톱’이라는 이름 역시 시각적 효과를 가리키지 않는다. 상판이 구조체에서 떠 있는 듯 보이도록 설계함으로써 가구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면과 간격의 관계로 읽힌다. 이때 구조는 감춰지지도, 과시되지도 않는다. 불필요해 보이는 정밀한 결구는 오히려 구조를 책임의 형식으로 만든다. 한국적 포스트 데 스틸로 불려도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가구의 구조는 혁신성에 대한 질문이다
리트펠트의 <적·청 의자>가 구조를 믿었던 마지막 전위였다면, 그의 아들의 <피라미드 의자>와 고범석의 가구 세트는 구조를 더 이상 믿지 않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전자는 세계의 통일을 꿈꾸었고, 후자는 세계의 불일치를 전제한다. 그럼에도 형식은 남는다. 예술에서 구조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미학의 급진성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데 스틸은 구성주의와 마찬가지로 재현을 멈춘 뒤, 의미를 과잉 생산하지 않았다. 대신 형식을 통해 말해지지 않음의 여백을 남겼다. 이 결단은 리트펠트의 의자에서 시작되어, 네오 데 스틸을 거쳐 한국의 가구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조건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
아방가르드 미학의 급진성은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무엇을 끝까지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 태도에 있다. 데 스틸이 질서를 믿었던 마지막 전위였다면, 네오 데 스틸은 그 믿음이 무너진 이후에도 형식을 포기하지 않는 윤리다. 구조가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일상 세계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남을 때, 아방가르드는 비로소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혁신적 미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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