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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승호 교수의 현대미술론 4. 세잔과 오지호의 풍경화: 지각으로 세계를 그리다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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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을 문제 삼은 세잔, 지각에 거주한 오지호


쇠라와 남농 허건의 풍경화에서 우리는 ‘점’이라는 최소 단위를 통해 지각의 전환을 경험했다. 그들이 과학의 눈으로 세계를 해체하고, 동시에 몸의 감각으로 자연을 인식했다면, 그들의 회화는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 인식을 어떻게 질서화하는가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번 칼럼에서는 한 걸음 더 깊이 모더니즘의 핵심으로 들어가 보자. 폴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산(Mont Sainte-Victoire)>과 오지호의 <계곡추경>은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출발했지만, 하나의 질문을 공유한다. 회화는 무엇을 그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이게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폴 세잔(Paul Cézanne), <생트 빅투아르산(Montagne Sainte-Victoire)>, 1904, 캔버스에 유채, 70 × 92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Philadelphia, USA

세잔: 색과 면, 붓질로 구조화한 지각의 세계
현재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소장한 <생트 빅투아르산>(1904)은 세잔 회화 실험의 완숙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세잔의 죽마고우였던 에밀 졸라에게 “아름다운 모티브(beau motif)”라고 표현했듯, 고향 엑상 프로방스의 생트 빅투아르산은 그에게 자연 풍경이 아니라 보는 방식을 실현하는 회화적 실험실이었다. 이 모티브를 다룬 작품들이 현재 전 세계 20여 개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산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근대 회화의 결정적 질문이었음을 증명한다.

세잔에게 산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었다. 20여 년간 반복해서 그려진 이 산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지각 속에서 생성되는 과정이었다. 그의 화면에서 형태는 결코 안정되지 않는다. 짧고 반복되는 붓질은 산의 윤곽을 고정시키지 않고 오히려 흔들어 놓는다. 앞과 뒤, 위와 아래의 공간은 명확히 분리되지 않으며, 시선은 하나의 지점에 머물지 못한 채 화면 위를 배회한다.

이 불안정성은 미숙함이 아니라 의도다. 세잔의 풍경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세계가 얼마나 불안정한 지각 위에 놓여 있는가를 드러낸다. 그는 자연을 해체하려 한 것이 아니라, 보는 행위 자체의 문제에 천착했다.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산과 하늘의 경계는 해체되고, 평원과 집들의 형태는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분절된다. 대신 작은 색면들이 겹치고 쌓이며 화면을 구성한다. 대상의 외곽은 사라지고 붓질만 남는다. 상단부의 산과 하늘은 파랑과 회청색 계열의 차가운 색조로 안정된 질서를 형성하고, 전경의 평원은 황토, 연두, 연주황의 따뜻한 색들이 불규칙하게 분절된다. 이 난색과 한색은 서로 침투하며 조율되고, 그 과정에서 공간이 형성된다.

이 작품에서 시점은 고정되지 않는다. 르네상스 이래 회화의 불문율이었던 단일 소실점은 무너지고, 대신 지각이 이동하는 궤적이 화면에 남는다. 세잔에게 자연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구성되고 분석되어야 할 지각의 구조였다. 인상주의자들이 감각의 즉시성을 추구했다면, 세잔에게 지각은 분석되고 조직되는 과정이다. 이 회화에서 산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라, 지각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자연은 해체되고, 회화는 지각의 구조로 재조직된다.


오지호, <계곡추경>, 1978, 캔버스에 유채, 40.8 × 53.1cm,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오지호: 색과 붓질로 거주하는 지각의 세계
오지호의 <계곡추경>(1978)은 남도의 자연을 이상화하거나 재현한 작품이 아니다. 이 그림은 자연을 바라보는 지각의 방식 자체를 포착한 회화다. 현재 광주시립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그가 인상주의 이후 한국 회화가 지각을 어떻게 자기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 작품에서 산과 나무, 바위는 여전히 인식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재현된 대상이 아니라, 색과 붓질로 응집되고 조율된 감각의 덩어리다. 원경의 산은 푸른색과 청색, 회청색의 차가운 색조로 단순화되어 화면의 중심축을 형성한다. 이 산은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니라, 화면 전체의 균형을 잡아주는 질서다.

중경의 능선과 숲은 노랑, 황토, 연두, 주황 계열의 따뜻한 색조로 가을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 그러나 색은 면으로 고정되지 않고 붓질의 층위를 이루며 진동한다. 간간이 등장하는 녹색의 소나무는 이 따뜻한 색조와 조율되며 지각의 생동감을 증폭시킨다. 전경의 바위는 짙은 남색과 청회색으로 표현되어 차갑고 무거운 질량감을 지닌다. 이 바위 앞에서 우리는 ‘본다’기보다 발을 디딘다는 감각을 경험한다.

오지호의 화면에서 난색과 한색은 대립하지 않는다. 따뜻한 색은 차가운 색 속으로 스며들고, 차가운 색은 따뜻한 색 위에 질서를 부여한다. 그 결과 화면은 깊어지지만 멀어지지 않고, 생동하지만 흩어지지 않는다. 붓질은 사물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짧고 방향성 있는 터치들은 형태를 단순화하며 지각의 리듬을 만든다. 사물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형태는 외형이 아니라 몸의 시선을 지나간 흔적으로 남는다.

이 작품의 공간은 원근법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위와 아래, 앞과 뒤는 색의 온도와 밀도로 대체된다. 공간은 환영이 아니라 지각의 축적이다. 이로써 <계곡추경>은 자연이 대상이 아니라 만남이며, 풍경이 아니라 사건이고, 재현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계를 인식하기와 세계 속에 거주하기
세잔과 오지호의 풍경화는 다른 양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둘은 지각에 대한 서로 다른 윤리를 제시한다. 세잔의 풍경이 “나는 지금 보고 있는 중이다”라는 현재진행형의 지각이라면, 오지호의 풍경은 “이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다”는 정착된 시각의 선언에 가깝다. 전자가 지각의 불안을 드러냈다면, 후자는 그 불안을 하나의 질서로 봉합했다.

그래서 세잔은 서구 모더니즘 회화를 뒤흔들었고, 오지호는 한국 근대회화를 성립시켰다. 세잔이 자연을 통해 지각의 탄생을 보여주었다면, 오지호는 자연을 통해 지각의 거주를 증언한다. 프랑스 남부의 산은 지각이 세계를 만든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남도의 계곡은 지각이 세계에 속해 있다는 기억을 남겼다.

같은 자연을 그렸지만, 하나는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안에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 결정적 차이야말로, 세잔과 오지호의 풍경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이자 사유의 대상이 되는 근거다.


김승호 동아대교수, 미술평론가

출처: 
https://thepress1.com/news/8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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