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과 존재의 문제로 이동하기 : 도자예술의 혁신
이번 칼럼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 해명은 바우하우스의 게르하르트 마르크스(Gerhard Marcks), 네오-아방가르드의 한스 코퍼(Hans Coper), 그리고 한국적 응답으로서 윤광조의 포스트-아방가르드 작업을 통해 추적하고자 한다. 이 세 작가의 흐름 속에서 도자가 ‘쓰임의 존재’에서 ‘형식의 존재’로, 그리고 다시 ‘생성의 존재’로 전환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미학의 혁신성은 새로운 형식에 있지 않다. 오히려 도자의 미적 형식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전후에 들어와 예술은 더 이상 무엇을 만드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게 하는가의 문제로 이동이 본격화된다. 물론 시작은 회화와 조각이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도자와 같은 ‘쓰임의 예술’이다. 왜냐하면 도자는 기능과 결합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의 미학적 혁신성은 이 기능을 해체하고 형식의 문제로 전환하는 데 있으며, 이 과정에서 도자는 주변적 공예를 벗어나 예술의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 매체로 인식된다.
도자는 오랫동안 쓰임의 존재였다. 그것은 물을 담고 음식을 저장하며 인간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도구였다. 전통 도자는 무엇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며, 이 용도의 명확성은 동시에 한계를 규정한다. 기능은 형식을 지배하고, 형식은 기능에 종속되며, 아름다움 또한 그 안에 머문다. 그러나 아방가르드의 출현은 이 관계를 전복한다. 더 이상 담지 않는다면 도자는 무엇이 되는가, 이 물음 자체가 혁신이다.
게르하르트 마르크스(Gerhard Marcks), [인물장식 항아리], 약 1922–1924, 도자, 유약, 높이 30–40 cm, Bauhaus Archiv 및 독일 주요 미술관
질서와 구조: 게르하르트 마르크스(1889-1981)와 바우하우스 도자의 전환
20세기 초, 이 질문이 바우하우스 도예공방에 방향에 중심이 된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요청에 따라 바우하우스의 형태교수로 재직한 게르하르트 마르크스는 도자를 다시 구조와 비례의 문제로 환원한다. 오늘날 예술과 공예의 통합을 추구한 작가로 평가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장식적 요소를 제거하고, 형태의 균형과 질서를 드러낸 작가이기 때문이다. 인물 형상이 결합된 항아리에서 기능의 흔적은 남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용기가 아니라 하나의 조형적 구조로 전환된 것도 사실이다. 이때 도자는 담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형태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
마르크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표현이 아니라 구조다. 그는 도자를 통해 바우하우스의 기초이념인 형태미의 질서를 탐구한다. 이 질서는 기하학적 규칙을 넘어 인간의 삶을 조직하는 하나의 원리다. 바우하우스의 맥락에서 보면 보편적 질서의 구현이다. 드디어 도자는 여기서 ‘쓰임의 존재’에서 ‘형식의 존재’로 이동한다. 아방가르드 미학이 도자에서 불거졌다는 사실, 형식이 더 이상 기능에 종속되지 않고, 하나의 자율적 구조로 등장한 사건으로 기록된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한스 코퍼(Hans Coper), [물레 성형 병], 1960년대, 석기질 도자, 산화소성 높이 40–60 cm, York Art Gallery.
형식은 존재한다 : 한스 코퍼(1920-1981)의 도자
전후 한스 코퍼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코퍼의 도자는 항아리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내부는 더 이상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뉴욕의 모마와 런던의 빅토리아 미술관에 소장된 그의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된 그의 작품은 물을 담지 않고, 음식도 저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닫혀 있고, 때로는 불균형하며, 조각과 같은 긴장감을 드러낸다. 중심 기둥 위에 얹힌 원판 구조나, 비례가 어긋난 형태들은 안정과 불안정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에게 도자는 더 이상 무엇을 위함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예술이다.
코퍼의 작업은 중요한 전환을 보여준다. 기능을 제거한 이후, 도자는 단순히 형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드러난다. 즉, 형식은 더 이상 기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여기서 도자는 ‘존재론적 오브제’로 전환된다.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자다. 이때 질문이 발생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자는 더 이상 그릇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을 드러내는 하나의 미학적 사건이 된다.
윤광조, [혼돈], 2013, 적점토, 화장토, 흘리기·뿌리기 기법, 높이 약 44 cm, 개인소장
형식의 생성 : 윤광조(1945)와 한국 도자
한국의 윤광조는 형식의 완결성을 거부하며, 도자를 다시 생성의 과정으로 돌려놓는다. 그의 분청 작업에서 매끄럽게 정리된 형태 대신, 찢기고 벌어진 구조, 그리고 흘러내리는 표면이 드러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 영국박물관, 호주빅토리아국립미술관, 벨기에 마리몽로얄미술관 등에 소장된 그의 작품, 흙이 더 이상 통제된 물질이 아니다. 흘러내리고, 쌓이며, 우연적인 흔적을 남긴다. 그에게 흔적들은 장식과 거리가 먼 시간의 기록이다. 도자는 이렇게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존재한다.
윤광조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그의 도자는 완결된 오브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상태에 가깝다. 표면에 남겨진 흔적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행위를 동시에 답보한다. 이때 도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형식은 고정된 상태로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열려 있는 과정으로 전환된다. 이는 서구 아방가르드가 형식의 자율성과 존재를 강조했던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혁신이다. 그는 형식을 다시 시간 속으로 돌려보낸 작가다.
형식의 전환으로서의 도자예술 : 아방가르드의 혁신성
아방가르드미학의 세 가지 중요한 단계가 분명해진다. 하나는 쓰임의 해체이다. 도자는 더 이상 기능에 종속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형식의 자율성이다. 도자는 구조와 비례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형식으로 등장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존재와 생성의 문제이다. 도자는 고정된 오브제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가 된다. 이 세 단계는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혁신이라는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이어진다.
마르크스, 코퍼 그리고 윤광조로 이어지는 혁신의 흐름은 도자 양식과 무관하다. 도자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의 변화다. 마르크스는 도자를 구조로 환원하며 형식의 질서를 제시한다. 코퍼는 그 형식을 기능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존재 자체로 만든다. 윤광조는 그 존재를 다시 시간 속에서 열어 놓으며 생성의 과정으로 전환한다. 이 연속적인 전환 속에서, 도자는 점점 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가장 어렵다. “도자는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더 이상 기능으로 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담는가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미학은 이렇게 묻는다. “도자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도자에 대한 물음만이 아니다. 예술 전체에 대한 질문이며, 나아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아방가르드미학은 바로 이 질문을 가능하게 만든다.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 데 있다. 이 질문을 가장 물질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도자다. 손으로 만들어지고, 불을 거치며,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이 물질은, 인간=행위와 자연=과정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방식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된다.
도자는 쓰임에서 시작되었다. 그 쓰임은 더 이상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아방가르드의 도자는 형식으로 전환되고, 존재로 확장되며,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도자는 공예를 넘어, 예술의 본질을 드러내는 혁신적 사건이다.
아방가르드미학의 혁신성은 이미 존재하던 쓰임의 질서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형식의 자율성과 존재의 조건을 새롭게 배치하는 데 있다. 도자는 가장 물질적인 방식으로 예술로서, 무엇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존재가 드러나는 사건이며, 형식이 시간 속에서 출현하는 혁신적 미학이다. 전전과 네오-, 포스트-아방가르드 흐름 속에서 도자는 세계를 사유하고 존재를 묻는 철학적 물음과 마주한다.
출처 : 뉴스플릭스(NewsFlix)(https://www.newsflix.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