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저드의 '상자' VS. 이우환의 '관계항'

도날드 저드의 〈무제(Untitled)〉(1967, 녹색 플렉시글라스, 왼쪽)와 이우환의 관계항(부산시립미술관)
실존을 불태운 코기토, 그 이후의 냉담
서구 근대 사상의 뿌리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다. 시민사회 이후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자, 만물을 관찰하고 재단하는 절대적인 사유의 주체로 자리했다.
본 현대미술론 칼럼은 이 코기토(사유하는 주체)의 관점에서 모더니즘 미술의 주체성이 어떻게 변형되고 확장되었는지 비평적으로 고찰해 왔다.
지난 칼럼에서는 '추상'이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서 절대적 이성과 기하학적 질서를 추구했던 전전(戰前)의 미술을 살펴보았다. 또한, 참혹했던 세계대전의 잔해 속에서 피어난 전후의 추상표현주의와 한국적 앵포르멜이 어떻게 인간성을 복원하려 몸부림쳤는지 그 실존적 코기토를 추적했다. 시대적 상황과 국가적 배경은 달랐을지언정, 이들에게 모더니즘은 사유하고 실존하는 인간을 증명해 내는 엄숙한 성전(聖殿)과 같았다.
그러나 1960년대 뉴욕, 이 엄숙한 거대 서사에 근원적인 회의를 품은 젊은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영웅적 숭고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던 격정적 붓질을 시대착오적인 기만이자 주체를 우상화하는 연극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이들이 택한 길은 코기토의 진화가 아닌, 서구 사상을 지배해 온 인간 중심적 주체성의 완벽한 해체와 소멸이었다.
예술작품이 더 이상 인간의 위대한 내면을 투영하기를 거부할 때, 미술은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인간의 사유가 증발한 자리에 남겨진 날것의 세계는 무엇일까?
이번 칼럼에서는 이 질문의 최전선에 서 있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냉담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서구 미니멀리즘의 주역인 도널드 저드(Donald Judd)의 차가운 기계적 사물과, 이에 대응해 또 다른 차원의 탈주체화를 이룩한 이우환의 작업을 교차하며, 현대미술이 인간 중심의 환영(Illusion)을 벗겨내고 사물 그 자체를 어떻게 직시하게 되었는지 추적한다.

도널드 저드 (Donald Judd), 〈무제(Untitled)〉, 1967, 녹색 플렉시글라스(아크릴) 및 스테인리스 스틸, 10개의 유닛으로 구성, 각 유닛 23 X 101.6 X 78.7 cm, 설치 시 전체 높이 약 3.8m(일부), MoMA
도널드 저드의 상자, 미술관에 나타난 진짜 물체
1965년, 도널드 저드(Donald Judd)는 비평문 「구체적 오브제(Specific Objects)」를 발표하며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그동안 서구 미술을 지배해 온 전통적인 규칙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는 평평한 캔버스 위에 입체감과 깊이감을 흉내 내는 모든 회화를 환영(가짜 형상)으로 보았다. 눈앞에 없는 허상을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인지적 왜곡에 불과하다고 일축한 것이다. 전통 조각 역시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나무나 돌을 깎아 영웅의 몸을 만들거나 거대한 역사적 이야기를 재현하는 등,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서사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저드는 그 비평문에서 어떤 거짓도 없이, 공간 속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3차원의 구체적인 물체 자체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마침내 저드는 이러한 철학을 담은 대표작 〈무제(Untitled, 일명 'Stacks')〉(1967) 연작을 세상에 내놓는다.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 이 작품은 똑같은 크기의 직사각형 금속 상자 10개를 미술관 벽면에 수직으로 차례로 쌓아 올린 형태다. 흥미로운 점은 상자 하나의 높이와 상자 사이 여백의 높이가 정확히 1:1 비율을 이루며 정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저드는 이 상자를 만들 때 스스로 철판을 자르거나 용접하지도 않았다. 그저 정밀한 설계 도면만 공장에 보내 완성된 상자를 받아왔을 뿐이다. 이로써 예술가란 모름지기 혼자 고뇌하며 작품을 창조하는 존재라는 오랜 환상이 깨졌다.

도널드저드, 무제, 1980, 알루미늄에 산화처리, 황동, 239x61x69cm, 국립현대미술관
저드는 자신을 일종의 제조업자로 위치시키며, 작가의 손맛이나 붓질 같은 인간적인 흔적을 완벽히 지워버렸다. 이 차가운 상자들 앞에서 관람객의 습관적인 의미 부여나 문학적인 해석은 힘을 잃는다. 규칙적인 크기와 공백으로 이루어진 상자 자체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물질적 존재감 때문이다.
미술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역시 저드의 작업이 과거의 오랜 관습을 깨부수었다고 평가했다. 기존의 미술이 가만히 멈춰 서서 이성으로만 감상하는 관람객의 눈을 만족시켰다면, 저드의 작품은 공간 속에서 직접 걷고 움직이며 온몸으로 느끼는 지각하는 신체를 소환했다는 것이다. 저드는 작품을 자기 뜻대로 지배하려 드는 작가의 주체성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정의 내리려던 관람객의 권한마저 내려놓게 만들었다. 예술작품을 인간 내면의 표현물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 존재하는 익명의 사물로 돌려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작품 앞에는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지금, 여기의 실제 공간과 신체의 경험만이 선명하게 남는다. 이성의 눈으로 작품 속에 숨은 뜻을 찾는 대신,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세계를 온몸으로 느끼게 만든 거대한 인식의 전복이었다.
이우환과 〈관계항〉, 동양적 현상학이 이룩한 무위(無爲)의 탈주체화
서구의 미니멀리즘이 인간의 주체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오랜 이성 중심주의를 해체했다면, 동시기 한국과 일본을 무대로 활동한 이우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체의 소멸에 도달했다.
서구의 사유가 사물 자체의 고립된 완벽성과 논리적 순수성에 집착했다면, 이우환은 인간의 작위적인 의도를 멈추는 동양의 '무위(無爲)'를 바탕으로 물질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맺는 현상학적 관계에 주목했다. 그의 〈관계항〉 연작은 서구적 미니멀리즘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도 날카로운 동양적 반론이다.

Lee Ufan, Relatum — stone, iron plate, Space. 이우환 공간, 부산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야외 조각공원과 이우환 공간 등에서 만날 수 있는 〈관계항〉의 구성은 지극히 단순하다. 전시장 바닥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거대하고 둥근 자연석(돌)과, 제철소에서 매끄럽고 평평하게 재단되어 나온 직사각형의 철판이 서로 맞닿아 있거나 적정한 거리를 둔 채 마주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 내포된 물질 간의 긴장감은 팽팽하다.
이우환은 돌을 정으로 깎아 조각하지 않으며, 철판을 구부리거나 용접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랜 시간 사색하며 자연의 돌을 ‘발견’하고, 문명의 철판을 ‘선택’했을 뿐이다. 작가가 행하는 유일한 예술적 행위는 이 두 가지 상반된 물질을 그저 그 자리에 '놓아두는' 일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명처럼, 〈관계항〉의 핵심은 평면과 입체의 갈등이나 조화가 아니라 서로 다른 맥락에 있던 사물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관계성과 물질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 가공되지 않은 돌과 가공된 철판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무위의 방식은, 관람객이 존재의 의미와 그들 사이의 여백에 주목하게 만든다. 특히 여기서 철판은 인간과 돌, 즉 나와 타자를 연결하는 '중간항(통로)' 역할을 한다. 철판이 중간에서 딱딱하고 차가운 돌에 보이지 않는 진동을 일으키며, 관람객에게 물질 그대로의 세계를 지각하게 만들고 사물들이 맺는 관계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작품 속 두 물질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철판은 도널드 저드의 금속 상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논리적 사유와 기술 문명이 낳은 극도의 인위적 산물이다. 반면 돌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해 온,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대자연의 시간과 비인간의 영역을 대변하는 천연의 물질이다.
이 지점에서 창조자로서의 예술가라는 서구적 주체 개념은 들어설 자리를 잃고 탈주체화된다. 작품은 작가의 천재성에 의해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들의 만남을 잠시 주선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우환은 자신을 절대적 주체가 아닌, 물질과 공간을 연결하는 매개자 혹은 안내자로 자리매김한다. 이는 인위적인 것을 내려놓고 자연의 순리에 나를 맡기는 동양적 비움의 실천과 닿아 있다. 나아가 철판과 돌의 조우는 인간 중심주의의 오만함을 해체한다. 매끄러운 철판(인간의 이성적 주체와 합리성)이 거칠고 거대한 돌(비인간적 자연 타자)과 마주했을 때, 철판은 더 이상 공간을 지배하는 절대적 중심이 되지 못한다. 돌이 뿜어내는 수억 년의 시간성 앞에 철판의 인위성은 한낱 찰나의 흔적으로 격하된다.
이우환은 인간의 사유를 대변하는 철판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타자(돌)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구 사상이 신성시해 온 절대적 이성의 주체가 거대한 자연의 물성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겸허히 해체되는 순간, 바로 이것이 〈관계항〉이 무위를 통해 이룩한 탈주체화의 본질이다.

이우환, 관계항-안과 밖의 공간, 2016, 스테인리스 스틸판과 자연석, 이우환 공간 야외조각공원, 부산시립미술관
작가의 소멸이 불러온 새로운 주체, 지각하는 신체의 소환
과거의 이성이 추상의 순수함을 낳았고 실존주의가 추상표현주의의 격정을 폭발시켰다면, 1960~70년대의 미니멀리즘은 마침내 인간이라는 거대한 우상을 미술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도널드 저드는 서구적 합리주의를 극한으로 밀어붙여 기계적 규칙으로 작가의 영혼을 증발시켰고, 이우환은 동양의 무위 사상을 결합해 물질과 공간이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작가의 의도를 비워냈다. 이들의 작업은 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예술은 더 이상 인간 주체의 사유를 투영하는 거울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권위가 소멸한 화이트 큐브에는 차가운 적막만 남는가. 역설적이게도 그 빈자리에 미술사상 가장 역동적인 새로운 주체가 걸어 들어온다. 바로 관람객의 신체다. 아무런 서사도 주지 않는 저드의 차가운 알루미늄 상자 앞을 서성일 때, 관람객은 상자를 보려 움직이는 자신의 물리적 신체를 자각한다. 상자 사이의 빈 공간, 벽면에 맺히는 빛과 그림자는 관람객이 움직일 때마다 매 순간 다르게 지각된다.
이우환의 돌과 철판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공기 속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은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돌과 철판이 만들어낸 공간의 무게감을 온몸의 감각으로 경험한다. 과거의 관람객이 작가의 사유를 추적하는 수동적인 이성(코기토)에 머물렀다면, 미니멀리즘 이후의 관람객은 공간 속에서 물질과 부딪히며 스스로 지각을 구성해 나가는 능동적인 현상학적 주체로 부활한다.
예술의 중심축이 작가의 내면에서, 지금 이 순간 전시장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는 관람객의 현존으로 이동한 것이다. 결국 미니멀리즘이 가져온 인간 중심주의의 해체는 미술의 종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재적 사유를 투영하던 스크린을 벗겨내고, 사물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동등한 층위에서 생생하게 소통하는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의 출현이었다. 작가가 소멸한 바로 그 자리에서, 세계의 참된 물성과 우리의 살아있는 신체가 만나기 시작했다.

김승호 동아대교수
도날드 저드의 〈무제(Untitled)〉(1967, 녹색 플렉시글라스, 왼쪽)와 이우환의 관계항(부산시립미술관)
실존을 불태운 코기토, 그 이후의 냉담
서구 근대 사상의 뿌리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다. 시민사회 이후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자, 만물을 관찰하고 재단하는 절대적인 사유의 주체로 자리했다.
본 현대미술론 칼럼은 이 코기토(사유하는 주체)의 관점에서 모더니즘 미술의 주체성이 어떻게 변형되고 확장되었는지 비평적으로 고찰해 왔다.
지난 칼럼에서는 '추상'이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서 절대적 이성과 기하학적 질서를 추구했던 전전(戰前)의 미술을 살펴보았다. 또한, 참혹했던 세계대전의 잔해 속에서 피어난 전후의 추상표현주의와 한국적 앵포르멜이 어떻게 인간성을 복원하려 몸부림쳤는지 그 실존적 코기토를 추적했다. 시대적 상황과 국가적 배경은 달랐을지언정, 이들에게 모더니즘은 사유하고 실존하는 인간을 증명해 내는 엄숙한 성전(聖殿)과 같았다.
그러나 1960년대 뉴욕, 이 엄숙한 거대 서사에 근원적인 회의를 품은 젊은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영웅적 숭고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던 격정적 붓질을 시대착오적인 기만이자 주체를 우상화하는 연극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이들이 택한 길은 코기토의 진화가 아닌, 서구 사상을 지배해 온 인간 중심적 주체성의 완벽한 해체와 소멸이었다.
예술작품이 더 이상 인간의 위대한 내면을 투영하기를 거부할 때, 미술은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인간의 사유가 증발한 자리에 남겨진 날것의 세계는 무엇일까?
이번 칼럼에서는 이 질문의 최전선에 서 있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냉담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서구 미니멀리즘의 주역인 도널드 저드(Donald Judd)의 차가운 기계적 사물과, 이에 대응해 또 다른 차원의 탈주체화를 이룩한 이우환의 작업을 교차하며, 현대미술이 인간 중심의 환영(Illusion)을 벗겨내고 사물 그 자체를 어떻게 직시하게 되었는지 추적한다.
도널드 저드 (Donald Judd), 〈무제(Untitled)〉, 1967, 녹색 플렉시글라스(아크릴) 및 스테인리스 스틸, 10개의 유닛으로 구성, 각 유닛 23 X 101.6 X 78.7 cm, 설치 시 전체 높이 약 3.8m(일부), MoMA
도널드 저드의 상자, 미술관에 나타난 진짜 물체
1965년, 도널드 저드(Donald Judd)는 비평문 「구체적 오브제(Specific Objects)」를 발표하며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그동안 서구 미술을 지배해 온 전통적인 규칙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는 평평한 캔버스 위에 입체감과 깊이감을 흉내 내는 모든 회화를 환영(가짜 형상)으로 보았다. 눈앞에 없는 허상을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인지적 왜곡에 불과하다고 일축한 것이다. 전통 조각 역시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나무나 돌을 깎아 영웅의 몸을 만들거나 거대한 역사적 이야기를 재현하는 등,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서사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저드는 그 비평문에서 어떤 거짓도 없이, 공간 속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3차원의 구체적인 물체 자체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마침내 저드는 이러한 철학을 담은 대표작 〈무제(Untitled, 일명 'Stacks')〉(1967) 연작을 세상에 내놓는다.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 이 작품은 똑같은 크기의 직사각형 금속 상자 10개를 미술관 벽면에 수직으로 차례로 쌓아 올린 형태다. 흥미로운 점은 상자 하나의 높이와 상자 사이 여백의 높이가 정확히 1:1 비율을 이루며 정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저드는 이 상자를 만들 때 스스로 철판을 자르거나 용접하지도 않았다. 그저 정밀한 설계 도면만 공장에 보내 완성된 상자를 받아왔을 뿐이다. 이로써 예술가란 모름지기 혼자 고뇌하며 작품을 창조하는 존재라는 오랜 환상이 깨졌다.
도널드저드, 무제, 1980, 알루미늄에 산화처리, 황동, 239x61x69cm, 국립현대미술관
저드는 자신을 일종의 제조업자로 위치시키며, 작가의 손맛이나 붓질 같은 인간적인 흔적을 완벽히 지워버렸다. 이 차가운 상자들 앞에서 관람객의 습관적인 의미 부여나 문학적인 해석은 힘을 잃는다. 규칙적인 크기와 공백으로 이루어진 상자 자체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물질적 존재감 때문이다.
미술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역시 저드의 작업이 과거의 오랜 관습을 깨부수었다고 평가했다. 기존의 미술이 가만히 멈춰 서서 이성으로만 감상하는 관람객의 눈을 만족시켰다면, 저드의 작품은 공간 속에서 직접 걷고 움직이며 온몸으로 느끼는 지각하는 신체를 소환했다는 것이다. 저드는 작품을 자기 뜻대로 지배하려 드는 작가의 주체성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정의 내리려던 관람객의 권한마저 내려놓게 만들었다. 예술작품을 인간 내면의 표현물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 존재하는 익명의 사물로 돌려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작품 앞에는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지금, 여기의 실제 공간과 신체의 경험만이 선명하게 남는다. 이성의 눈으로 작품 속에 숨은 뜻을 찾는 대신,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세계를 온몸으로 느끼게 만든 거대한 인식의 전복이었다.
이우환과 〈관계항〉, 동양적 현상학이 이룩한 무위(無爲)의 탈주체화
서구의 미니멀리즘이 인간의 주체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오랜 이성 중심주의를 해체했다면, 동시기 한국과 일본을 무대로 활동한 이우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체의 소멸에 도달했다.
서구의 사유가 사물 자체의 고립된 완벽성과 논리적 순수성에 집착했다면, 이우환은 인간의 작위적인 의도를 멈추는 동양의 '무위(無爲)'를 바탕으로 물질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맺는 현상학적 관계에 주목했다. 그의 〈관계항〉 연작은 서구적 미니멀리즘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도 날카로운 동양적 반론이다.
Lee Ufan, Relatum — stone, iron plate, Space. 이우환 공간, 부산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야외 조각공원과 이우환 공간 등에서 만날 수 있는 〈관계항〉의 구성은 지극히 단순하다. 전시장 바닥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거대하고 둥근 자연석(돌)과, 제철소에서 매끄럽고 평평하게 재단되어 나온 직사각형의 철판이 서로 맞닿아 있거나 적정한 거리를 둔 채 마주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 내포된 물질 간의 긴장감은 팽팽하다.
이우환은 돌을 정으로 깎아 조각하지 않으며, 철판을 구부리거나 용접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랜 시간 사색하며 자연의 돌을 ‘발견’하고, 문명의 철판을 ‘선택’했을 뿐이다. 작가가 행하는 유일한 예술적 행위는 이 두 가지 상반된 물질을 그저 그 자리에 '놓아두는' 일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명처럼, 〈관계항〉의 핵심은 평면과 입체의 갈등이나 조화가 아니라 서로 다른 맥락에 있던 사물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관계성과 물질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 가공되지 않은 돌과 가공된 철판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무위의 방식은, 관람객이 존재의 의미와 그들 사이의 여백에 주목하게 만든다. 특히 여기서 철판은 인간과 돌, 즉 나와 타자를 연결하는 '중간항(통로)' 역할을 한다. 철판이 중간에서 딱딱하고 차가운 돌에 보이지 않는 진동을 일으키며, 관람객에게 물질 그대로의 세계를 지각하게 만들고 사물들이 맺는 관계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작품 속 두 물질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철판은 도널드 저드의 금속 상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논리적 사유와 기술 문명이 낳은 극도의 인위적 산물이다. 반면 돌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해 온,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대자연의 시간과 비인간의 영역을 대변하는 천연의 물질이다.
이 지점에서 창조자로서의 예술가라는 서구적 주체 개념은 들어설 자리를 잃고 탈주체화된다. 작품은 작가의 천재성에 의해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들의 만남을 잠시 주선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우환은 자신을 절대적 주체가 아닌, 물질과 공간을 연결하는 매개자 혹은 안내자로 자리매김한다. 이는 인위적인 것을 내려놓고 자연의 순리에 나를 맡기는 동양적 비움의 실천과 닿아 있다. 나아가 철판과 돌의 조우는 인간 중심주의의 오만함을 해체한다. 매끄러운 철판(인간의 이성적 주체와 합리성)이 거칠고 거대한 돌(비인간적 자연 타자)과 마주했을 때, 철판은 더 이상 공간을 지배하는 절대적 중심이 되지 못한다. 돌이 뿜어내는 수억 년의 시간성 앞에 철판의 인위성은 한낱 찰나의 흔적으로 격하된다.
이우환은 인간의 사유를 대변하는 철판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타자(돌)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구 사상이 신성시해 온 절대적 이성의 주체가 거대한 자연의 물성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겸허히 해체되는 순간, 바로 이것이 〈관계항〉이 무위를 통해 이룩한 탈주체화의 본질이다.
이우환, 관계항-안과 밖의 공간, 2016, 스테인리스 스틸판과 자연석, 이우환 공간 야외조각공원, 부산시립미술관
작가의 소멸이 불러온 새로운 주체, 지각하는 신체의 소환
과거의 이성이 추상의 순수함을 낳았고 실존주의가 추상표현주의의 격정을 폭발시켰다면, 1960~70년대의 미니멀리즘은 마침내 인간이라는 거대한 우상을 미술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도널드 저드는 서구적 합리주의를 극한으로 밀어붙여 기계적 규칙으로 작가의 영혼을 증발시켰고, 이우환은 동양의 무위 사상을 결합해 물질과 공간이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작가의 의도를 비워냈다. 이들의 작업은 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예술은 더 이상 인간 주체의 사유를 투영하는 거울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권위가 소멸한 화이트 큐브에는 차가운 적막만 남는가. 역설적이게도 그 빈자리에 미술사상 가장 역동적인 새로운 주체가 걸어 들어온다. 바로 관람객의 신체다. 아무런 서사도 주지 않는 저드의 차가운 알루미늄 상자 앞을 서성일 때, 관람객은 상자를 보려 움직이는 자신의 물리적 신체를 자각한다. 상자 사이의 빈 공간, 벽면에 맺히는 빛과 그림자는 관람객이 움직일 때마다 매 순간 다르게 지각된다.
이우환의 돌과 철판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공기 속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은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돌과 철판이 만들어낸 공간의 무게감을 온몸의 감각으로 경험한다. 과거의 관람객이 작가의 사유를 추적하는 수동적인 이성(코기토)에 머물렀다면, 미니멀리즘 이후의 관람객은 공간 속에서 물질과 부딪히며 스스로 지각을 구성해 나가는 능동적인 현상학적 주체로 부활한다.
예술의 중심축이 작가의 내면에서, 지금 이 순간 전시장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는 관람객의 현존으로 이동한 것이다. 결국 미니멀리즘이 가져온 인간 중심주의의 해체는 미술의 종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재적 사유를 투영하던 스크린을 벗겨내고, 사물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동등한 층위에서 생생하게 소통하는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의 출현이었다. 작가가 소멸한 바로 그 자리에서, 세계의 참된 물성과 우리의 살아있는 신체가 만나기 시작했다.
김승호 동아대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