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현대미술론 칼럼에서 우리는 조각의 중요한 전환 지점을 확인했다. 하나는 조각이 재현을 넘어 형태의 붕괴를 통해 형식의 자율성에 도달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그 형식이 주체성의 미적 범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조각은 더 이상 대상의 외형을 모사하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전환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질문이 제기된다. 형식과 주체 이후, 조각은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양식 변화가 아니라, 조각이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를 묻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질료(hylē)와 형상(morphē)의 결합으로 설명했다. 질료는 가능성이고, 형상은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원리다. 전통 조각에서 이 관계는 명확했지만, 모더니즘에서 근본적으로 흔들린다. 형상은 더 이상 외부에서 부과되지 않으며, 질료 역시 수동적 재료로 머물지 않는다.
조각은 이제 묻는다. 질료는 재료인가, 생성의 조건인가. 형상은 완결된 구조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발생하는 과정인가. 이 질문은 모더니즘 조각이 도달한 깊은 층위이며, 동시에 오늘날 조각이 다시 시작하는 지점이다.
Jean/Hans Arp(1886–1966), <Human Concretion>,1933–1935, 석고, 이후 대리석 및 브론즈 캐스팅, 49,5 x 47,6 x 64,7 cm, MoMA
장 아르프 — 생성되는 조각 형식
아르프의 <인간적 응결>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곡선은 기하학적 질서를 거부하면서도 결코 무질서하지 않으며, 형태는 내부에서 자라난 흔적처럼 드러난다. 표면은 생명의 압력이 바깥으로 밀려 나온 결과처럼 느껴지며, 전체는 하나의 유기적 흐름 속에서 유지된다. 특히 어느 한 지점에서도 형태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며, 각각의 곡면은 서로를 밀어내면서 동시에 지탱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이 조각은 인간의 외형을 재현하지 않는다. ‘인간적 응결’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생명적 형상으로 응축될 때의 상태를 묻는다. 인간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라, 발생의 감각으로 전환된다. 이때 관람자는 특정 신체를 인식하기보다, 생명이 스스로 형태를 조직해 가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질료는 형상을 기다리는 바탕이 아니라 형상을 발생시키는 장이며, 형상은 완결된 결과가 아니라 생성의 과정이다. 닫혀 있으면서 끝나지 않고, 안정되어 있으면서 정지하지 않는 상태—이 모순적 긴장이 아르프 조각의 핵심이다.
형식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된다. 조각은 만드는 행위에서 발생하는 조건으로 이동하며, 재현을 넘어 존재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묻는다.
헨리 무어 — 공간과 조각
Henry Spencer Moore(1898–1986), <Reclining Figure>, 1938, 브론즈, 소형 60cm 내외/ 중형 100~150cm, 대형 130cm 등 버전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Tate Modern, Britain
무어의 <누워 있는 형상>은 질량이 아니라 공간으로 인식된다. 인체의 덩어리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공간의 흐름이며, 조각은 그 흐름 속에서 경험된다. 특히 질량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라, 공간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매개로 기능한다.
공극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형태를 분절하고 다시 연결하는 중심 구조이다. 시선은 그 틈을 통과하며 이동하고, 조각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형되는 구조로 드러난다. 이때 공극은 단순히 비어 있는 부분이 아니라, 시선과 움직임을 조직하는 적극적 요소로 작용한다.
이 인체는 더 이상 해부학적 대상이 아니다. 분절되고 변형된 신체는 재현이 아니라 공간을 구성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공극은 외부 공간을 끌어들이며, 조각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열린 구조가 된다. 빛과 그림자는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내부 공간까지 확장되며, 조각의 형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형상은 질량과 공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이며, 질료는 공간을 드러내는 매개가 된다. 이로써 조각은 객체에서 경험으로, 고정된 형태에서 시간 속 구조로 전환된다.
최만린 — 리듬의 조각
최만린(1935-2020), <태(胎,)>, 960년대 후반–1970년대, 브론즈, 100 × 80 × 60 cm 내외, 국립현대미술관.
최만린의 <태> 연작에서 형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한다. 곡선은 반복되며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고, 정지된 상태 속에서도 생명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이 운동은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형태 내부에 축적된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긴장과 완화의 흐름으로 경험된다.
질료는 생명의 가능성이며, 형상은 그 에너지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따라서 형상은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생성의 과정이다. 이 조각은 닫혀 있으면서도 확장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내부의 응축과 외부로의 확장이 반복되면서 리듬을 형성한다. 이러한 리듬은 일정한 반복이 아니라, 미묘한 변형과 차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갱신된다.
이 리듬은 단순한 시각적 패턴이 아니라, 생명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형태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는 상태이며, 질료는 형상을 밀어내는 힘의 원천이 된다.
결국 최만린에게 조각은 대상이 아니라 흐름이며 상태다. 관람자는 완성된 형상이 아니라, 형성이 진행되는 순간, 곧 존재가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생성, 공간, 생명의 모더니즘 조각
아르프, 무어, 최만린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조각은 더 이상 고정된 정의로 묶이지 않는다. 그것은 생성되고, 열리며, 흐른다.
질료는 의미를 생산하는 조건이 되고, 형상은 관계와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조각은 조건이자 사건 그 자체다. 아르프에서 형상은 생성이 되고, 무어에서 형상은 공간이 되며, 최만린에서 형상은 생명의 과정으로 확장되듯이, 모더니즘 조각은 물질도 형식도 거부한다. 오히려 생성의 방식이며, 공간의 구조이며, 생명의 리듬이다. 조각은 존재가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조각은 다시 경계에 선다. 조각이 더 이상 형태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이제 그것은 개념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철학박사 김승호(동아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