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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방가르드미학, 건축으로 본 혁신성: 삶·구조·경험·존재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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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플릭스] 김승호 철학박사(동아대학교 교수)= 예술은 어디에서 현실이 되는가


아방가르드는 오랫동안 새로운 형식을 발명하는 운동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언제나 결과에 머문다. 형식은 변화의 표면일 뿐이며, 그 이면에는 더 근본적인 전환이 존재한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방식, 곧 감각의 조건 자체의 변화다.


아방가르드는 예술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실천이다. 그리고 그 실천이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실현되는 장르가 바로 건축이다. 건축은 단순한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고 머무르며 경험하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페터 뷔르거가 지적했듯이, 아방가르드의 핵심은 예술과 삶의 분리를 해체하고 그것을 다시 통합하려는 데 있다. 이 명제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공간 속에서, 구조 속에서, 경험 속에서 실현된다.


이번 칼럼은 네 개의 건축을 따라간다. 삶의 구조, 구조의 폭로, 경험의 형성 그리고 존재의 조건이라는 네 단계는 예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점점 더 근원적인 층위로 이동하는 하나의 존재론적 계열이다.



헤릿 리트벨트, [리트벨트 슈뢰더 하우스](내부 사진), 1924, Utrecht, Netherlands. De Stijl의 회화적 원리가 건축으로 전환 및 공간이 삶을 조직하는 조건이 됨.


삶의 구조 — 예술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리트벨트 슈뢰더 하우스>(1924).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 위치한 <리트벨트 슈뢰더 하우스>는 바우하우스 건축공방이 제기했던 핵심 문제, 곧 예술과 삶의 분리를 해체하고 그것을 하나의 구조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급진적으로 실현한 건축이다.


건축가 헤릿 리트벨트는 전통적 주택 개념을 해체한다. 벽은 더 이상 공간을 고정하는 구조가 아니라 이동 가능한 요소이며, 공간은 기능에 따라 선험적으로 분할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과 상황 그리고 거주자의 행위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동시대의 기능적 유연성과 달리 공간의 존재 방식 자체의 변화다. 피에트 몬드리안의 회화에서 수직과 수평이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였듯이, 리트벨트는 그 원리를 건축으로 확장한다. 선은 벽이 되고, 색면은 구조가 되며, 평면은 관계의 체계로 전환된다.


건축은 형태를 완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를 조직하고 삶이 전개될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하는 체계다. 거주자는 공간을 사용하는 존재에서 그 안에서 삶을 구성하는 주체가 된다. 공간은 삶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삶이 생성되는 조건으로 전환된다. 예술은 환경이며 구조이며 삶의 조건으로 작동한다. 예술은 삶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첫 번째 혁신이다.



렌조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 [퐁피두 센터] (외관 사진), 1977, 프랑스 파리. 구조의 외부 노출, 건축이 자신의 구조와 조건을 스스로 드러내는 비판적 장치로 전환.


구조의 폭로 — 건축은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는가


렌조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의 <퐁피두 센터>(1977). 프랑스 파리 중심부에 세워진 <퐁피두 센터>는 건축이 삶을 조직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조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환된 사례다. 이 건물에서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것은 낯섦이다. 외부로 노출된 배관과 구조, 색으로 구분된 기능 체계는 전통적 건축이 유지해온 질서를 전복한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해체되고, 건물은 하나의 기계처럼 작동하는 구조를 드러낸다.


이 변화는 형태적 실험을 넘어 건축의 존재 조건을 외부로 드러내는 전략이다. 전통적 건축이 구조를 감추고 형태를 강조했다면, 이 건축은 모든 작동 원리를 외부로 끌어내어 보여준다. 건축은 여기서 하나의 시스템이다. 건물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지를 읽는 것이다. 형태는 결과가 되고 구조는 드러나며 건축은 비판적 장치로 전환된다.


네오 아방가르드는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제기한다. 이 구조는 어떻게 가능해졌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건축은 당시 정유공장과 같은 건물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나, 오늘날에는 현대 건축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이 변화는 감각의 기준 자체가 변했음을 의미한다. 이해할 수 없던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는 과정 속에서 아방가르드의 두 번째 혁신, 곧 예술은 감각의 기준을 바꾸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도 담는다.



피터 아이젠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필드 사진), 2005, 독일 베를린. 2711개의 콘크리트 스텔라, 기억을 재현하지 않고, 경험하게 만드는 공간적 윤리.


경험의 형성 — 의미를 넘어서는 공간


피터 아이젠만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2005). 독일 베를린 중심부에 조성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건축이 더 이상 구조를 드러내는 데 머물지 않고, 인간이 그 안에서 무엇을 경험하는가를 문제 삼는 단계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은 건축을 해석할 수가 없다. 동일한 형태의 콘크리트 기둥은 반복되지만 그 높이는 미묘하게 달라지고, 지면은 점차 기울어지며, 동선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단순한 구조처럼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갈수록 불안정해진다. 시야는 차단되고 타인의 존재는 사라지며, 행위자는 점점 고립된다. 어떤 의미의 이해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 도달한다. 즉, 불안과 상실, 고립 등이 비좁은 공간과 공간 사이에서 생성된다. 이 건축은 의미를 거부하고 대신 감각을 조직한다.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예술은 고통을 화해시키지 않는다. 이 건축은 그 원리를 공간으로 실현한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아방가르드는 세 번째 전환에 도달한다. 형식이나 구조가 아니라 경험 자체가 예술의 중심이 된다.



승효상, [수졸당] (내부/마당 사진), 2002, 서울 종로구. 내부-외부의 유동성 및 머무름의 공간.


존재의 조건 — 비움 속에서 드러나는 것


승효상의 <수졸당>(2002).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수졸당>은 건축이 더 이상 무엇을 드러내거나 조직하려 하지 않는 마지막 단계의 전환을 보여준다. 이 건축은 이성적 행위인 형태 읽기와 구조 해석의 충동과 욕구가 자연스럽게 멈춘다.


승효상의 <수졸당>은 무엇을 제시하지도, 설명하지도 않는다. 불필요한 요소들도 제거됨으로써 공간을 비워둔다. 비움은 결코 결핍이 아니다. 조건이다. 구조는 절제되고 공간은 열려 있으며,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느슨하게 이어진다. 빛과 공기, 시간은 이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흐른다.


어느 누구도 이 건축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시 받지 않는다. 대신 머무르게 된다. 머무름과 침묵, 사유라는 상태 속에서 감각은 자극되기보다 가라앉는다. 공간은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다. 공간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는 조건이다. 건축은 더 이상 개입하지 않으며,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 지점에서 아방가르드는 마지막 전환에 도달한다. 무엇을 만들거나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머묾이다. 아방가르드미학이 도달한 조용하면서도 한국적 혁신이다.


아방가르드의 혁신성 — 형식 이후의 조건


이 네 건축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리트벨트 슈뢰더 하우스는 삶의 구조를, 퐁피두 센터는 구조의 폭로를,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경험의 형성을, 수졸당은 존재의 조건을 각각 드러낸다.


이 흐름은 발전보다는 점점 더 근원으로 내려가는 과정이다. 형식에서 출발하여 구조를 거치고, 경험을 통과하여, 결국 존재에 도달하는 깊이의 이동이다.


아방가르드의 혁신성은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조건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무엇을 보게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보게 하는가의 문제로 전환되는 데 있다.


이러한 변화는 지금도 계속된다. 오늘날 예술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데서 의미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익숙하다고 믿는 세계를 다시 낯설게 만들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과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되묻게 한다.


아방가르드는 끝난 것이 아니다. 페터 뷔르거가 말한 예술과 삶의 일원화는 하나의 역사적 구호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과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미학의 혁신성은 완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의 존재 조건을 새롭게 사유하는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다.


출처 : 뉴스플릭스(NewsFlix)(https://www.newsflix.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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