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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승호 교수의 현대미술론 11, 모더니즘 조각에서 형식은 어떻게 주체가 되는가— 나는 형상을 만든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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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조각과 주체의 탄생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이나 전통이 보증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주체가 된다. 이 선언은 모더니즘 조각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조각은 더 이상 세계를 모방하는 데 있지 않다. 모더니즘에서 조각은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행위가 된다. 여기서 주체란 생각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형식을 통해 세계를 만들어내는 존재를 의미한다.


회화가 평면 위에 세계를 ‘보이게’ 한다면, 조각은 실제 공간 속에 하나의 존재를 ‘세운다’. 돌, 흙, 청동, 석고와 같은 물질은 그 자체로는 아직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질료이다. 조각가의 손을 거쳐 비례와 리듬을 얻는 순간, 그것은 비로서 형상이 된다. 다시 말해, 조각은 질료가 형상을 얻어 비로소 존재가 되는 예술이다. 따라서 모더니즘 조각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형상을 만든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우리는 앞선 칼럼에서 조각이 더 이상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오귀스트 로댕, 콘스탄틴 브랑쿠시, 김종영의 작품을 통해 형태의 붕괴와 형식의 자율성에 도달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형식이 자율성을 획득하는 순간, 새로운 질문이 발생한다. 그 형식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제 우리는 아리스티드 마이욜, 르누아르–귀노의 공동작업 그리고 김복진의 작품을 통해 이 질문을 한 걸음 더 깊이 경험해 보고자 한다.



게르하르트 마르크스(Gerhard Marcks), [인물장식 항아리], 약 1922–1924, 도자, 유약, 높이 30–40 cm, Bauhaus Archiv 및 독일 주요 미술관



질서와 구조: 게르하르트 마르크스(1889-1981)와 바우하우스 도자의 전환


20세기 초, 이 질문이 바우하우스 도예공방에 방향에 중심이 된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요청에 따라 바우하우스의 형태교수로 재직한 게르하르트 마르크스는 도자를 다시 구조와 비례의 문제로 환원한다. 오늘날 예술과 공예의 통합을 추구한 작가로 평가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장식적 요소를 제거하고, 형태의 균형과 질서를 드러낸 작가이기 때문이다. 인물 형상이 결합된 항아리에서 기능의 흔적은 남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용기가 아니라 하나의 조형적 구조로 전환된 것도 사실이다. 이때 도자는 담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형태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


마르크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표현이 아니라 구조다. 그는 도자를 통해 바우하우스의 기초이념인 형태미의 질서를 탐구한다. 이 질서는 기하학적 규칙을 넘어 인간의 삶을 조직하는 하나의 원리다. 바우하우스의 맥락에서 보면 보편적 질서의 구현이다. 드디어 도자는 여기서 ‘쓰임의 존재’에서 ‘형식의 존재’로 이동한다. 아방가르드 미학이 도자에서 불거졌다는 사실, 형식이 더 이상 기능에 종속되지 않고, 하나의 자율적 구조로 등장한 사건으로 기록된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르누아르–귀노의 공동작품 <세탁하는 여인> : 감각의 주체



르누아르–귀노(Pierre-Auguste Renoir & Richard Guino), La Grande Laveuse accroupie, 1917, bronze, 123 × 75 × 129 cm, Tate, London / Philadelphia Museum of Art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리샤르 귀노가 협업한 작품 <세탁하는 여인(La Grande Laveuse accroupie)>은 마이욜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여인은 몸을 낮추고 노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노동은 긴장이나 고통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몸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유기적 흐름을 형성한다. 마이욜의 신체가 닫힌 구조라면, 이 작품의 신체는 열려 있는 감각이다. 마이욜의 몸이 질서라면, 이 몸은 촉감이다. 브론즈는 단단한 금속이지만, 여기에서는 살처럼 느껴진다. 표면은 차갑기보다 따뜻하며, 눈으로 보는 동시에 손으로 만지는 듯한 감각을 유도한다. 


그들의 조각에서 인체의 윤곽선은 날카롭게 끊기지 않고 완만하게 이어지며, 팔과 등, 허벅지의 경계는 서로 스며들듯 연결된다. 이로 인해 형태는 고정된 구조라기보다 지속적으로 변형되는 흐름처럼 인식된다. 또한 표면의 미세한 굴곡은 빛을 부드럽게 확산시키며, 표면의 광택이 아니라 촉각적 밀도를 지닌 피부의 느낌을 형성한다. 여기서 질료는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금속은 금속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감각의 매개가 된다. 


마이욜이 질료를 질서로 전환했다면, 르누아르–귀노는 질료를 감각으로 전환한다. 형상은 구조가 아니라 지각의 방식이 된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주체는 사유하는 주체라기 보다는 경험하고 느끼는 주체이다. 르누아르–귀노에게 조각은 몸을 구조화하면서 그것을 질료 속에 감각을 머물게 한다. 그들에게 조각은 몸을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인간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때 주체는 형식을 통제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각 속에서 세계를 경험하고 구성하는 존재로 전환된다.


김복진의 <소년> : 역사적 주체



김복진, <소년>, 1930년대, 동(재현), 국립현대미술관


김복진(1906–1973)의 <소년>은 한국 근대 조각의 출발점에 놓인 작품이다. 소년은 정면을 향해 서 있다. 과장된 근육도, 기념비적 포즈도 없다. 그 단순함 속에서 강한 존재감이 드러난다. 이 힘은 형식의 완결성이나 감각의 아름다움에서도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에서 온다. 소년은 성장 중인 존재이다. 이 작품은 완결된 육체가 아니라, 되어가는 인간을 보여준다.


마이욜의 몸이 질서라면, 김복진의 몸은 역사다. 르누아르–귀노의 몸이 감각이라면, 김복진의 몸은 존재이다. 특히 그의 작품 대부분은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우리는 원작이 아니라 사진과 복원을 통해 그의 조각을 만난다. 그의 조각은 형상이 아니라 기억의 형상이다. 아쉽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직시하게 한다. 


그가 말한 “생명의 운율”은 조각의 핵심을 드러낸다. 조각은 표피를 닮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안의 생명의 흐름을 붙잡는 일이다. 김복진에게 조각은 몸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역사 속에서 인간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신체는 단단히 닫힌 덩어리라기보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정리되어 있으며, 불필요한 세부가 절제된 채 중심축을 따라 안정된 균형을 유지한다. 얼굴과 신체의 표현 역시 과도한 감정이나 장식 없이 정제되어 있다. 개별 인물의 초상이라기보다 하나의 시대적 인간형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절제된 형식은 외형의 완성보다 존재의 방향성을 드러내며, 조각이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형성 과정임을 보여준다. 


김복진의 <소년>의 형상은 제목이 말하는 소년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운율이며, 동시에 한국 근대가 스스로를 세우려는 의지의 형상이다. 김복진의 조각은 완성된 인간을 보여주지 않고, 보여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인간-형상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지점, 곧 인간-한국이 형성되는 순간을 붙잡는다. 따라서 <소년>조각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된다. 이때 주체는 단순히 형식을 구성하는 존재를 넘어,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로 드러난다.



모더니즘 조각에서 주체의 재구성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모더니즘 조각은 이 명제를 물질의 차원에서 다시 쓴다. 조각은 생각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조각은 질료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질료는 형상을 얻을 때 비로소 존재가 된다. 따라서 조각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형상을 만든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마이욜은 형식을 통해 질서를 세웠고, 르누아르–귀노는 감각을 통해 경험을 구성했으며, 김복진은 역사 속에서 인간을 다시 세웠다. 마이욜은 형식으로, 르누아르는 감각으로, 김복진은 역사로 주체를 구성한 경우다.


모더니즘 조각은 하나의 새로운 정의에 도달한다. 그것은 재현의 예술도, 단순한 형식의 예술도 아니다. 그것은 형식을 통해 세계를 조직하고, 감각을 통해 경험을 구성하며, 역사를 통해 인간을 다시 세우는 주체의 예술이다. 모더니즘 조각은 새로운 질문에 도발한다. 형식이 주체에 의해 구성되는 순간, 그 주체 또한 다시 물음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 주체는 과연 하나의 중심으로 존재하는가. 조각이 형식을 통해 주체를 세웠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그 주체가 어떻게 흔들리고, 어떻게 해체되는가이다.



철학박사 김승호(동아대학교 교수)
출처 : https://thepress1.com/news/1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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